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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2017.03.04

1. 이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2월 한 달간 목요일마다 원룸에서는 다큐멘터리룸(이하 ‘다큐룸’)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다큐룸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이에 관해 토론하는 프로그램으로 2017년 2월 9일에는 Yuval Hameiri의 〈I Think This Is the Closest to How the Footage Looked〉(2016)와 Betzabé García의 〈Kings of nowhere〉(2015)을 시청했다. 다큐룸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최지현은 〈I Think This Is the Closest to How the Footage Looked〉를 “이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로 번역했는데, 이 말이 왠지 멋있어서 아이폰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I Think This Is the Closest to How the Footage Looked〉는 가족(그러니까 등장인물)을 사물로 빗대어 말하면서 시작한다. 아빠는 커피 그라인더, 엄마는 물감, 여동생은 천사 피규어, 감독은 문고리. 아픈 물감 곁에서 천사 피규어가 책을 읽고, 커피 그라인더는 이 모습을 촬영하고, 그날 밤 물감은 병으로 죽는다. 여기까진 엄마가 죽는 순간을 사물들로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실재 세계. 이튿날 감독은 아빠가 촬영한 영상을 다시 되감기 해놓는데, 엄마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 아빠는 이를 모른 채로 그날 집안 풍경을 손이 가는 대로 찍는다. 꽃을 찍다가, 화분을 찍다가, 옷장을 찍다가, 손잡 이를 찍다가 엄마가 누워있었던 소파를 찍다가 하는 식이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기록이 아빠의 슬픔으로 대체된다. 감독은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잡아내려고 되감기 일시 정지를 반복하다 다큐멘터리가 끝난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지 못한 지인에게 그날 본 것을 설명하려는데 같이 본 친구와 내 기억이 자꾸 엇갈려서 엇갈린 채로 서로의 기억을 이야기하다 결국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대화가 맴돌기만 했다. 친구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사람들이 슬퍼해서 토론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고 했고, 나는 사람들이 별 감흥을 보이지 않아 다음 다큐멘터리로 넘어갔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서로가 자신의 기억이 좀 더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주장하며 대화를 이어나 갔는데, 그러다 대화가 흐지부지 끝났다.

2. 잔상

양아영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책방 만일’에서였다. 안개꽃처럼 보이는 꽃이 담긴 투명한 화병이 화면 오른쪽을 차지하는 그런 일반적인 정물화였는데, 화면 왼쪽에 금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화면 전체에 금을 그린 것인지, 애초에 금이 나 있는 벽 앞에 놓인 화병을 그린 것인지, 헷갈려 하면서 책방을 나갔던 기억이다.
     T.J 클라크는 “피사로와 그의 동료”들의 그림에서 이전과 달리 “사물을 재현하는 방식을 거의 알아볼 수 없”다고 말 한다. 이는 이들이 “세상의 모습”을 “흘끗 본 유사함의 난무 속에서 그리고 단순한 물질로 사라져 버리는 그 지점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믿”1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바뀌면, 재현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이를테면 〈not count〉2, 가로로 면적을 차지하는 테이블과 대치되게 세로 선으로 의자 다리와 상판 일부가 그려져 있다. (테이블로 생기는) 수평과 (의자로 인한) 수직의 교차로 공간의 깊이감은 사라진다. 작가의 대부분 작품에서 그렇듯, 여기서도 공간은 확장되지 못하고 닫혀있다. 테이블 위에는 케이크와 컵, 담배, 장미 다발이 있는데, 장미 다발은 커피잔에 가려서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인지, 의자 위에 놓인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컵 뒤에 있지만, 커피잔 보다 더 큰 면적을 차지하는 장미 다발 옆으로 좀 더 확대된 형태의 장미가 있다. 공간은 닫혀있고, 사물은 닫힌 공간 안에서 순환한다. 테이블, 케이크, 컵, 꽃, 다시 테이블.3
     이것은 사생하지 않고 이후에 대상을 화면에 배치할 때 딸려 들어온 것들이다. 테이블을 보고, 테이블에 놓인 케이크를 보고, 컵을 보고, 장미를 보다, 다시 장미를 보고, 장미를 기억하고, 테이블 위에 있는 사물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후에 ‘기억한’ 사물을 화면에 배치한다. 사물들이 언제 어떻게 작가의 기억에 기입되었는지 알 수 없다. 구체적인 풍경이 지워진 자리엔, 덩어리처럼 어떤 잔상만이 존재하고, 화면에는 잔상들이 배치된다.

3. 평평한 화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리컵과 스틸잔, 석류처럼 보이는 덩어리, 이 모두를 담고 있는 쟁반, 그리고 화면 상단에 있는 석고상의 일부. 〈sit and omit〉4, 화면 왼편에 놓인 유리컵은 바로 앞에서 바라본 형태처럼 보이고, 중앙에 놓인 유리컵은 훨씬 거리를 두고 봤을 때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 형태가 동시에 존재하기 위해선 사물들 간의 일정한 거리가 필요한데 화면에선 유리컵이 쟁반 위에 비슷한 크기로 나란히 그려져 있어 오히려 왼편의 유리컵이 화면에서 돌출되어 보인다. 깊이감은 사물로, 그림자 덩어리로 완전히 흡수되어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까 이 화면은 깊이를 만드는 화면이 아니라 캔버스에서 시작되는 화면이다. 화면(정확하게 말해서 표면)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여기저기 떠다니는 덩어리들이다. 덩어리들이 화면을 채운다.
     유리컵이 놓인 쟁반은 화면의 2/3를 차지한다. 얼마 남지 않은 부분에 석고상 일부가 그려져 있다. 석고상 일부 역시 유리컵 크기와 별반 다르지 않아 깊이감은 완전히 사라진다. 반면에 입체감은 여전한데, 이는 석고상 바로 아래 놓여있는 그림자 때문이다. 석고상의 그림자(형태)는 광원이 석고상을 정면으로 비추어야 가능하다. 빛은 석고상뿐만 아니라 쟁반에도 비추인다. 쟁반에 떨어지는 빛은 위에서 아래로, 그러니까 수직으로 낙하한다. 따라서 석고상의 그림자와 쟁반의 그림자는 같은 시공에 존재할 수 없다. 이는 화면에만 국한되는 폐쇄적인 빛을 상정하고 화면 을 구성해나간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간에 있던 사물을 한 화면에 배치했기에 가능하다. 공존할 수 없는 빛과 시간이 한 화면에 있다. 그림자의 존재로 사물의 입체감은 여전하지만, 깊이감은 상쇄된다. 사물의 형태는 자신들이 ‘있는’ 공간이 2차원의 평평한 화면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평평한 화면에서(만) 가능한 배치이다.
     화면이 평평하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면, 사물 역시 평평한 화면에 맞게 다시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사물을 3차원 공간에서 입체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평평한 화면에 입체감을 나타내어야 할까. 깊이감이 존재할 수 없는 (말 그대로) 표면이 주어졌다면, 작가는 사물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요소들을 가져와 평평한 화면에 ‘배치’한다. 비록 평평한 화면에서 이 요소들이 덩어리처럼 떠다닐지 몰라도 사물은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존재한다.

4. 정확한 규모와 운동의 세계5

인간은 무언가를 전달하거나, 길들이기 위해 화면에 깊이를 만들고 채운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정확한 규모와 운동의 세계”6이다. 이 세계를 구축(혹은 구성)하는 방식은 작가마다 다르다.
     ‘나혜석’은 “평면과 입체가 합하여 한 물체가 된 것 같이 평면 즉 외면과, 입체 즉 내부가 합하여 하나의 사회가 성립 된 것이니 어느 것을 따로 떼어 볼 수가 없다”7고 말한다. 외부와 내부,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하는 것이 나혜석에게 중요한 문제였으며, 이러한 자세를 “중용”8이라 말했다. ‘이제’는 “사물/그림에 정교한 질서를 부여”하기보단 “어딘가로부터 온 에너지가 인간으로 사물로 그 주변으로 머무르고 옮겨지면서 형성되는 온기”9를 화면에 그린다. 화면에는 “온기”가 침투된 사물과 풍경이 나타나 있다. 최정윤은 ‘최수인’이 “풍경을 자신의 심리 상태, 감정을 표출하는 소재로 삼았다”고 말한다. 최수인은 풍경을 유사성의 차원(그러니까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을 투사하는 공간으로 다루며, 그래서 최수인의 화면은 ”파토스(pathos)만이 남아있는 연극적 공간"10이다.
     양아영은 다소 무관하게 풍경(혹은 사물)을 관찰하고 그린다. 풍경(혹은 사물)에서 어떤 감정이 촉발되기보단, 그저 바라보는 쪽에 가깝다. 그리고 풍경(혹은 사물)이 풍경(혹은 사물)대로 존재할 수 있게 한다. 사물 그 자체 즉, 캔버스에서 말이다. 캔버스 또한 분명히 ‘사물’이지만, 인간은 인간적인 방식, 가령 “서사와 담론에 의해 채워지고 설명과 묘사에 의해 활성화”11되는 방식으로 캔버스를 채워왔다. 작가 역시 인간적인 방식인 그리기로 풍경(혹은 사물)을 나타내긴 하지만, 그리기가 유효할 수 있는 것은 그리기로 캔버스가 사물이라는 사실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평평한 화면에 맞게, 컵은 컵대로, 장미는 장미대로 그린다. 장미의 크기가 갑자기 확대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1. T.J 클라크, “모던한 삶의 회화: 마네와 그의 추종자들의 미술에 나타난 파리”,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 권영진 옮김, 눈빛, 2012, 379쪽.
  2. ‹not count›, 60.5 x 41 cm, 2017.
  3. 이와 같은 사물은 다른 작품에서도 반복된다.
  4. ‹sit and omit›, 90 x 90 cm, 2016.
  5. 소렌 안드레아센, 『질량과 질서 2』, 정주영 옮김, 미디어버스, 2016, 32쪽.
  6. 위의 책.
  7. 나혜석,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歐米漫遊하고 온 後의 나”(三千里 1932. 1), 『나혜석 전집』, 태학사, 2000, 488쪽.
  8. 나혜석, “美展 出品 製作 中에”(조선일보 1926, 5, 21), 『나혜석 전집』, 태학사, 2000, 559쪽.
  9. 이제, “온기에 대한 대화”, 2014.
  10. 최정윤, “힘을 그려내는 방법: 최수인의 작품세계”, 2016.
  11. W. J. 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김전유경 옮김, 그린비, 2010, 354쪽.

송하영
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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