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나는 배경에 둘러싸여 있다.
2017.03.04

도로변을 따라 줄지어 선 건물들의 외벽에는 붉은 벽돌, 자기질 타일, 금속 징크 패널, 샷시 유리창이 붙어있다. 연립주택, 빌라, 아파트, 오피스텔, 호텔, 사무실, 카페, 음식점, 상점 안으로 들어가면, 벽에는 스트라이프무늬 합지벽지, 꽃무늬 실크벽지, 흰색 무광 사각 타일, 회색 시멘트 블록, 마블링이 있는 인조 대리석, 자작나무결 시트지가 붙어 있다. 바닥에는 누런 모노륨 장판, 진회색 돌무늬 정사각 데코타일, 투명하게 빛나는 에폭시, 푸석푸석한 인조잔디가 깔려있다.

2015년 종로구 세운상가 5층 한 공간에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인테리어 공사의 시작은 대부분 기존 시설의 철거로 시작된다. 천장의 흡음재 텍스를 철거하니 곧바로 송판무늬 노출 콘크리트가 보인다. 벽에는 석고보드가 두 장 겹쳐져 있고 얇은 각목이 격자형으로 버티고 있다. 바닥에는 한 겹, 두 겹, 세 겹, 네 겹의 데코 타일, 장판이 깔려있다. 장판과 바닥 콘크리트 사이에는 마지막으로 접착제가 눌어붙어 있다. 텅 빈 바탕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또다시 철거 공정 역순으로 덧칠된다. 이번에는 바닥에 접착제를 바르고 투명 에폭시 용액을 쏟아붓는다. 시멘트 바닥이 투명하게 갇힌다.

배경은 액정 화면 안에서 계속된다. 화면에는 둥글거나 각진 여러 개의 아이콘이 떠 있고 그 뒤로 요세미티 계곡이 있거나, 우주 밖에서 본 지구가 있거나,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격자창이 있다. 모니터 강화유리 뒤에 촘촘히 박힌 LED 조명이 사용자 지정 바탕화면 이미지를 만든다. 그런데 아이콘 뒤에는 정말 요세미티 계곡이 있을까? 아이콘을 이리저리 옮겨보면 아이콘 뒤에 가려진 배경 이미지가 나타난다. 아이콘에 잠시 가려진 이미지가 원래 그대로 존재했던 것처럼 컴퓨터는 아이콘 뒤에 숨어있던 픽셀값을 빠르게 연산하여 빛으로 쏜다. 사실 아이콘 뒤의 배경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가 한순간에 액정 위로 부유할 뿐이다. 배경도 없고 전경도 없다. 모니터 위에 나타나는 것은 매 순간 달라지며 섞이는 이미지들의 조합이다.

설계를 위한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열어서 일을 시작한다. 공사 현장에서 실측한 공간의 치수를 바탕으로 가상의 벽을 세우고 바닥과 천장을 만든다. 그리고 완성된 모델링 표면에 현실의 재료와 비슷한 텍스쳐를 입힌다. 사실 텍스쳐 소스들은 건축자재를 정교하게 찍은 사진이다. 포토샵에서 원본 소스들의 가장자리를 다듬어 같은 소스들이 자연스럽게 반복되고 이어지는 패턴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패턴 소스들을 페인트 모양의 버킷에 담아 벽과 바닥과 천장에 쏟아붓는다. 이것저것 재질을 바꿔보기도 하고 패턴의 크기를 늘리고 줄이면서 적절한 장면을 찾는다. 이쯤 되니 도로변의 건물 벽 패널도, 실내의 벽지도, 모니터 상의 화면도 바탕에 도포된 얇은 페인트처럼 느껴진다.

모니터를 끄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더 정확히는 눈앞의 벽지를 바라본다. 벽지 뒤에는 콘크리트 벽, 석고보드, 나무 합판 혹은 유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벽지 뒤의 바탕이 무엇으로 되어있는지 벽지를 걷어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그런데 벽지 뒤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세운상가 바닥에는 장판이 네 겹이나 깔려있었다. 건물이 지어져 공간이 생긴 이후부터 그 공간을 둘러싼 벽과 바닥과 천장의 면들은 한 번도 비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모니터 화면처럼 액정이 켜지는 순간부터 종료되기 직전까지 지속해서 이미지를 물고 있을 뿐이다. 빈 바탕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조훈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으며, 원룸에서는 전시기획과 작품 제작 테크니션 그리고 공간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다.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