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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시네필리아에 대한 메모
2017.04.15

디지털 이미지가 가진 제1의 특성, 필름이라는 물질적 기체基體를 부드럽게 투과하는 유연성은, 여전히 영화 매체를 대하는 논자에게 해명해야 할 수수께끼로 주어진다. 한편 이 이야기는 아카데미와 비평계 내부에서 반복되고 또 순환되면서 그 논지를 잃고, 성급히 포스트–시네마라는 결론에 도착했다. 많은 영화를 여러 번 관람하고 이를 경험의 자양분으로 삼는 관객–유형으로 풀이됐던 시네필은, 동시대에 이르러, 대용량 외장 하드에 영화 파일을 잔뜩 수집하며 무비 노트북MUBI Notebook과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같은 해외 매체의 담론들을 미리 접하고 소개하는 이들로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술적 · 문화적 변화들이 초래한 자연스러운 변동이기에 관객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영화를 본다는 것의 윤리는 어제에서 오늘로 이행했다고,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거부한 당신은 퇴행적인 시네필이라고 저주를 퍼붓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이 글을 통해 의고주의와 퇴행이 현재의 관람 환경과 얼마나 다른지 묻고 싶다. 오래된 영화 보기 방식과 새로운 영화 보기 방식이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에게 추궁해보자. 우리는 이 차이를 명확하고 또 온전히 구별할 수 있을까?

카라가라가Karagaraga는 구하기 힘든 아트 하우스 영화와 희귀한 고전 영화들을 불법으로 공유하는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private tracker site다. 토렌트에 익숙하다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일명 B동, T동이 바로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로, 운영진에게 초대장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고, 가입 후에도 원활한 공유를 위하여 시드를 유지해야 하며, 규칙도 엄수해야 한다. 인터넷에 공유되는 모든 자료 배포는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에서 이뤄진다.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는 까다로운 가입 절차로 인해 불법 공유자의 IP 주소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저작권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세금 징수를 피하려고 조세 피난처로 망명한 알랭 들롱을 떠올려 보면) 저작권 피난처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카라가라가와 같은 사이트는 시네마게돈Cinemageddon(쓰레기 영화들을 배포하는 것으로 유명한), 시네마틱Cinematik, 시크릿–시네마Secret-Cinema, 골모건Gormogon, 아이러브클래식스ILoveClassics가 있다. 이들은 영화를 공유하는데 그치지 않고 영화 담론의 새로운 시네필 문화라고 불릴 만한 시네필–서클을 형성한다. 유운성 평론가가 『문학과사회』에 기고한 「밀수꾼의 노래」에서 언급한 대로 카라가라가는 나루세 미키오 전작의 자막을 만들기도 했고, 북미에서 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자크 리베트의 «아웃 원»Out 1(1971) 스페인어 자막판 영상을 공유하기도 한 바 있다. 이처럼 시네필 문화란 원시적인 사회주의 경제를 연상하게 하는 자발적인 배포와 선물 경제를 기본적인 전제로 한다.

한국엔 씨네스트 Cineast 라는 자막 사이트가 있다. 예를들면 ‘태름아버지’(본명 오철용)는 아트 하우스 영화들의 자막을 헌신적인 노력으로 제작해왔다. 최근에는 활동이 뜸해진 ‘태름아버지’ 대신 ‘macine’라는 유저가 보다 영웅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작가주의적 관점 아래 라브 디아즈, 미겔 고메스,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영화의 자막을 제작했고, 최근에는 요시다 기주의 영화 자막을 제작하고 있다. macine는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와 같은 문화 기관, 대형 영화제보다 한국의 시네필 문화에 더 큰 영향력 미치고 있다. 자막 제작자 개인이 인터넷 자막 사이트를 통해 한 영화감독의 회고전을 진행하는 것이다. 나 역시 미겔 고메스의 단편 «구원»Redemption(2006)이 보고 싶어 인터넷을 헤매다가 macine의 자막을 발견했던 때를 기억한다. 얼마나 반갑고 귀하던지! 공유 경제에 관한 낭만적 환상이 해적 경제의 파생물인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를 손쉽게 무산자無産者의 정치학으로 환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라는 단어에서 ‘비공개’가 ‘private’에 대응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들의 공유가 사적 소유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음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다. 오히려 비공개 트래커 사이트는 저작권의 감시망을 피해 온갖 영화를 공유하려고 더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새로운 시네필’ 문화는(당연히 기존의 시네필 문화보다) 조금 더 복잡한 층위를 갖고 있다. 영화평론가 기리쉬 샴부Girish Shambu는 ‘새로운 시네필’의 기원으로 영화를 보관하는 매체의 비물질화가 초래하는,(소비재화 된 경험, 브랜드 이름이 된 작가들을 떠올려보자) 새로운 형태의 소비주의와 너드 문화와 긱geek 문화를 놓는다.

“나는 여성의 전적인 부재로 하나가 된 긱 은하계의 남성적 행성인 프로그래밍과 퀴즈, 시네필 서클에 속한 적이 있다. 새로운 시네필리아(내가 경험해본 것만)는 내게, 걸신들린 영화 관람, 성마른 토론과 정전화와 분류라는 직설적이고 젊은 남성적인 공격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타의 솔직한 자칭 너드 그룹과는 다르게, 이러한 시네필리아는 더욱 상위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인해 긱 문화을 뛰어넘는다는 장점이 있다. 새로운 시네필의 스테레오타입은 긱들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로부터 파생된, 지적이고, 무신론자이며, 좌파적 가치를 학습했고, 해적질을 지지하고, 커리어–불가지론적이며, 철학을 사랑하는 사회적 부적응자인 20 대 초반의 추레한 오메가 남성(사회적 지위와 능력, 야망이 모두 낮은 남성)이다. 최근에 밀레니얼 세대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다양하고 통찰력 있는 논평을 읽었는데, 그중 가장 확실한 부분은 시네필리아가 긱–지향의 세대 / 문화적 이행의 직접적인 후손이라는 것이다.1

남성적인 시네필 문화, 덥수룩한 머리, 패딩, 거뭇거뭇한 수염, 사회성이 심각하게 저하된 말투. 나에게도 얼추 들어맞는 정의가 아닐 수 없다. 예전에 어떤 미술가가 서울아트시네마의 라운지에 한 데 모여 있는 시네필을 비꼬았던 글을 SNS 에서 본 적 있다. 익명의 미술가가 한 조롱은 불쾌했지만 사실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사회적 패배자들이 유일하게 큰 소리로 떠들 수 있는 곳이 시네마테크의 라운지니까. 너드 문화의 일종인 새로운 시네필리아는 ‘걸작’이라는 외침이 울려 퍼지는 ‘위대한 작가’의 팡테옹, 취향을 기준으로 폐쇄적이고 자기 기만적인 위계 아래에서 작동한다.

90년대 말부터 00년대 초까지 비평가들이 영화 매체에 가해진 변화에 대해 교환한 서신을 엮은 책 『영화 변종들Movie Mutations』에 실린 「로테르담에서의 샘플링Movie Mutations Sampling in Rotterdam」에서 조너선 로젠봄Jonathan Rosenbaum은 새로운 영화 관람 양식을 자신의 경험에서 끌어낸다. 로젠봄은 1998년 로테르담 영화제에 참석하여 40편의 영화를 봤지만, 그중 10편만 전편으로 보았을 뿐, 나머지 30편은 마치 DJ가 샘플링 하듯 파편적으로 관람했다고 말한다. 이 글이 쓰인 시점이 1998년이란 걸 염두에 둔다면 이 이야기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젠봄은 비평가, 학생, 영화감독은 모두 비디오로 영화를 보면서도 글을 쓸 때는 극장에서 많은 관객들과 같이 본 것처럼 이야기한다고 지적한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마사히로 시노다의 야쿠자 영화 «마른 꽃Pale Flower»(1964)을 절반, HBO의 «데드우즈Deadwoods»의 시즌 01, 05화까지, 루이 C.K가 제작하고 연출한 «호레이스와 피트Horace and Pete»의 07화까지 봤다. 이는 내 인내심과 집중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당대의 관람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1998 년에 로젠봄이 제시한 새로운 영화관람의 규준에 따라, 당대의 관람 양식의 몇몇 문제적 태도를 짚어보자.

① 파편적 영화관람
② 가역적인 영화관람

②는 관객이 영화를 비디오테이프, DVD , 파일로 되풀이해서 볼 수 있다는 말로, 더 이상 영화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스탠리 카벨 Stanley Cavell의 『눈에 비치는 세계The World Viewed』 서문은 기억의 오류로 인해 잘못 서술된 영화 내용을 수정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VHS 비디오가 등장하기 이전에 영화를 다시 볼 방법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관객, 학생, 비평가 모두 망각이라는 인간이 가진 신체적 한계로 인하여 영화를 파편적으로 기억했고, 기억 속에서 그 파편은 실물보다 크게 보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조건들이 영화 평론을 기억술에 단단히 매어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역적인 관람, 반복 관람이 언제나 가능한 지금의 상황은 영화 평론에서 기억이라는 장소를 상실하게 했다.

현재의 영화관람과 의고적인 영화관람을 응시의 현상학적인 체험으로 대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정한 조건 안에서 새로운 보기와 낡은 보기의 방식이 갈라질 뿐이다. 영화관과 영화관이 아닌 곳, 시네마와 포스트 – 시네마. 가브리엘 페둘라Gabriele Pedulla 는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오디토리엄이라는 의고적인 기원으로부터, 표준 영화 상영의 특징을 도출한다. “❶오디토리움의 엄격한 분리, ❷(거의)완벽한 어둠, ❸❹관객의 부동성과 침묵, ❺대형 스크린, ❻영화 경험의 공공적 본질2” 오늘날의 영화 관람은 이러한 여섯 가지 특징을 완벽히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철저한 수동성을 강제했던 조건들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지만, 어떤 평론가들은 영화 보기의 윤리가 과거나 오늘이나 동일한 것처럼 말한다. 포크 가수 대니얼 존스턴Daniel Johnston은 “내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My Own Opera”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내 오페라의 유령이야.
나는 내 기억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어.
( ... )
나는 내 오페라의 유령이야.
나는 모든 장면을 연기해.
자기야, 널 생각해.
나는 심지어 관객이기도 하지.”

  1. theseventhart.info/2015/06/21/book-nook-the-new-cinephilia
  2. 가브리엘 페둘라, 「영화관 이후 : 어제와 내일의 영화 관객」, 『눈』 6호, (noon) 2016년, 42쪽

강덕구
前 『오큘로』 편집인. 영상이론과 졸업 논문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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