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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순간, 장면
2017.04.15


며칠 전에 꾼 꿈은 아주 아름다운 꿈이었다. 깨어나자마자 나는 그 꿈을 기억하려 애썼다.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것들은 휘발되었지만, 색과 온도와 촉감의 아름다운 느낌은 남았다.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꿈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수몰 지역민들이 이주 후 모여 사는 마을에 이방인이 찾아온다. 그는 마을의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거리를 둔다. 그녀와 그 마을에는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점차 흐르고 그녀는 수몰된 고향에서 있었던 일을 조금씩 그에게 들려준다. 그녀에게는 연인이 있었고, 연인은 고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물에 잠겨 있다. 이방인도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고향도 물속에 잠겨있다. 서로의 결여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그를 받아들인다. – 2017년 2월 18일

뤽 다르덴이 죽는 꿈을 꿨다.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이 레인보우 스티커를 가슴에 붙이고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과 주차 구역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담은 영상이 인터넷 매체에 앞다투어 보도되었다. 나는 주차를 마친 뤽 다르덴이 괴한에게 둔기로 맞는 CCTV영상을 토렌트로 다운 받아놓고 결국 보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TV에는 뤽 다르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뉴스와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참으며 보고 있었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니 ? 나는 뤽 다르덴이 죽은 날이라고 하자 엄마는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 2015년 7월 9일

지난 밤에 꾼 꿈에서는 보라색 꽃들 옆에는 풍성하게 잎이 돋아난 나무들 아래에는 하늘과 구름이 떠 있는 물웅덩이 밟으며 튀기는 어린아이들 바쁘게 지나가는 북한 사람들이 나왔고 나는 그것들을 몰래 카메라에 담았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꼭 꿈속같이 맑았다. – 2016년 5월 8일


순간
일 년간 모인 필름들을 현상했다. 일 년이래 봐야 카메라를 통 들고 다니지 않아 몇 롤 되지 않고 그중 절반 넘게는 최근에 찍은 것들이지만, 몇몇 사진들은 잃어버린 순간을 되찾은 것처럼 반갑다. 바로 그 자리, 그 시간에 내가 정박해 있다.  – 2015년 2월 13일

나는 매일 일기장 맨 위에 써야 하는 숫자 ‘1996’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암호처럼, 늘 거기에 써야 하는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해가 바뀌자 6도 7로 바뀌었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서기가 무엇을 의미한다던가, 열두 달이 지나면 1년이 되고 1월 1일이 되면 나이를 한 살 먹는다는 것, 그렇게 시간이 지난다는 것들을 그제야 진짜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머릿속에서 흩어진 구슬들이 한 줄로 꿰어지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 2015년 11월 18일

그리고 그 안에는 몇몇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고, 순간들이 모여 삶이 되고 삶에 대한 의지가 된다. «지슬»은 사건이 아닌 삶의 지속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도. – 2013년 4월 3일

배가 강을 천천히 지나는 장면에서 눈이 감겼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같은 장면에서 같은 배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강도 다리도 배도 그 순간 흘러나오던 음악도 너무 아름다워서 기분이 이상했다. – 2015년 9월 24일


장면
지난밤 «파울볼»을 보다가, 고양 원더스의 원년 팬인 소년이 구단 해체 소식을 듣고 고개를 숙이며 서럽게 우는 장면에서 나도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선수가 떠나고, 팀이 해체하고, 자주 가던 식당이 사라지고, 기대가 배반 당하고, 희망이 거절 받는 것들. 그런 실연의 장면과 마주칠 때마다 내 안에서 무언가 하나씩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다시 응원을 바칠 팀을 찾았을까? – 2015년 6월 5일

이상하게 내용이 썩 마음에 와 닿진 않았는데 집 가는 길에 몇몇 장면과 음악이 두고두고 생각났다. 아름답고 슬픈데 어찌할 수 없는 삶, 다가갈 수도 만질 수도 없어 지켜보아야만 하지만 사력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것. – 2012년 3월 5일

모든 장면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허우적대던 마음 쪼가리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 2009년 3월 15일


마음
며칠 동안 마음이 답답했는데 광화문 분향소 앞 길게 이어진 줄에 서 있으면서 기운을 얻고 돌아왔다. 모니터 너머 얼굴 없는 말들에 화를 내고 좌절하곤 하지만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만큼은 진실인 것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고 노래하던 고등학생들의 맑은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 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 2015년 4월 16일

오늘 아침에 누구는 라오스에 갔다. 졸업 영화를 찍어오겠다고 했다. 어떤 영화가 될 진 누구도 모를 일이다. 무수히 많은 계획이 있어도 어떤 중요한 것들은 우연 속에서 탄생한다. 그것이 마음에 깊이 남을 때 우리는 필연이라고 부르게 되는 걸까. – 2013년 6월 24일

아이는 자라면서 열두 번 변성을 한다지만 난 앞으로도 더 많이 변할 것 같다. 내 마음의 천장은 아주 높다. 눌러 둔 스프링처럼 웅크리고 있던 생각들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 오를 거라는 불안과 기대가 있다. – 2004년 2월 13일


대화
집 근처에 고등학교가 있어서 종종 남학생 무리의 대화를 듣게 된다. 대체로 시끄럽고 내용의 절반은 욕설이지만, 오늘 들은 대화처럼 아주 가끔 귀여울 때도 있다. “내가 1학기 때는 수업 태도가 개판이었거든. 그런데 이제 싹 바뀌어서 수업 시간에 절대 안 졸아. 그랬더니 선생님이 마주칠 때마다 날 보며 배시시 웃으셔.” 옆에서 듣던 친구들은 절대 배시시가 아니었을 거라며 반발했다. – 2015년 8월 20일

나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그와의 세세한 대화들을 진작에 잊었지만 눈 내리던 염창역은 또렷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나는 그 전에도, 후에도 그가 준 책을 그저 간직하고자 했을 뿐 글 한 줄 읽어 내려가지 않았다. – 2011년 11월 28일


* 2003 년부터 현재까지의 일기 중 꿈, 순간, 장면, 마음, 대화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단들을 모았다.

임민지
영화가 좋아서 영상대학원에 갔다. 지금은 휴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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