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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T» 가이드: 규칙과 태도
2017.10.14
«PRESET» 수록

1. 탐구와 규칙

이 전시를 기획하면서 참고한 전시는 1) «Rules» 2) «평면탐구: 유닛, 레이어, 노스탤지어» 3) «MOVE & SCALE»이다. «Rules»는 기획의 계기를 “회화라는 매체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평면탐구: 유닛, 레이어, 노스탤지어»는 “평면으로 수렴하려는 충동을 시각적 상황으로 전치하려는 한국의 미술가”를 모았다고 한다. 이 두 기획에는 “회화라는 매체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모습 즉, “평면으로 수렴하려는 충동”이 공통분모로 존재한다. «Rules»는 이를 기존의 구상이나 추상과는 구별되는 “비재현적” 경향이라고 이름 붙인다. «평면탐구: 유닛, 레이어, 노스탤지어»는 좀 더 구체적으로 “평면을 채우기 위해 시각적 단위를 고안하거나, 프레임을 잘게 쪼개거나, 2차원의 평면을 중첩하여 두께와 시간을 부여하거나, 평면 회화 자체를 제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조”하는 작품을 구분하여 전시한다.

매체의 조건을 상수로 두면, 기획은 작가가 매체의 한계이자 조건을 인식한 상황에서 어떻게 작품을 전개하는지 설명하거나 이 방식 간의 유사성을 찾는 것으로 정리된다. 가령 «평면탐구: 유닛, 레이어, 노스탤지어»의 경우, 정말 이름 그대로 평면을 탐구하는 방식을 ‘유닛, 레이어, 노스탤지어’로 구분해서 보여준다. 이러한 기획은 평면을 탐구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제 목적에 충실한 대신 “서구의 추상 회화가 발전해 온 역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평면 회화”라는 수식어로 방법론에 대한 판단을 성급하게 내린다. 그러니까 작업 내에서 논리가 어떻게 작동되는지와는 별개로 이 논리에 기존 조건이나 한계에 대한 갱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다소 막연한 기대와 역할이 부여된다. 과정에 대한 어떤 판단은 “실험적 시도”라는 이름 아래 뭉뚱그려진다.

«Rules»는 참여한 작가들이 “온전히 ‘통치(rules)’할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규칙(rules)’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전시 제목을 ‘룰즈(rules)’로 이름 붙였다고 밝힌다. 여기서 작가는 규칙을 완전히 설계한다는 점에서 3인칭적 존재인 동시에 규칙을 그 누구보다 성실히 수행한다는 점에서 1인청적이다. 세계를 설계한 사람과 수행하는 사람이 동일하기에 이 세계는 그 자체로 완전하지만, 자기 지시적이며, 폐쇄적이다. 기획자는 작품과 작가의 관계를 전유하여 전시를 기획함으로써 어떠한 식으로든 개입을 시도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기획자가 기준으로 삼은 ‘규칙’이 전시에서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존중하는 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획은 각자의 닫힌 세계에 대한 설명이며, 그 세계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만 기능한다. 현실과의 접점을 지워버리는 게 편리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관객은 이 두 전시를 통해 동시대 회화에서 보이는 매체에 대한 질문이 실험적 시도라는 점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방법론에 대한 판단이 전부 ‘매체에 대한 고민’으로 정리되면, ‘매체에 대한 고민’으로 개별 작품의 특수성이 가려지며, 기획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에 그친다. 매체에 대한 고민은 기존 매체에 관한 인용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미술사를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쓰거나, 매체를 지지하는 것들에 대해 질문하며, 자신의 화면에 인용하고 주석을 단다. 그렇게 다시 배치하고 조합된 화면은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 관계를 형성하며, 화면의 조합들은 폐쇄적이라기보단 의미의 연쇄로 구성된 열린 구조를 갖는다. 이를테면 이 화면은 반복하여 수행하는 닫힌 세계가 아니라 과거를 인용할 수 있으며, 미래에 인용될 수 있는 확장된 화면인 것이다. 그러나 «평면탐구: 유닛, 레이어, 노스탤지어»와 «Rules»는 이 화면을 가장 비좁게 만들어 전시한다. 탐구 방식이나 규칙에 대한 설명은 화면에서 작동 방식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획자의 입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두 전시에서 화면은 과거와 미래 그 한 가운데가 아닌, 현재에 고정되어 기획자가 이해한 내용을 관객들도 이해하길 기다린다.

«MOVE & SCALE»은 매체가 갖는 자기 지시적인 고민을 시간성으로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전시가 던지는 질문은 ‘작품의 생애주기’와 ‘움직임’이다. 작품은 전시에서 전시로 이동하면서 분해되거나 더러는 사라지기도 한다. 도록이나 웹에 있는 작품 사진은 작품의 생명력을 간단히 연장해주지만, 작품의 물질성까지 담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작품의 범주를 어디서 어디까지로 설정할 수 있을까.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그린 드로잉도 작품으로 봐야 할까, 퍼포먼스를 위한 스코어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이 모든 과정이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평면을 탐구하는 방법론이나 규칙과 같은 과정까지도 작품으로 수용하여 전시하기로 한 이상 방법론과 규칙이 어떻게 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기획자는 판단해야만 하며,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


2. 규칙과 태도

주슬아, 임석호 작가는 그래픽 문법을 회화로 번역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번역의 과정에서 작가는 일련의 규칙을 세우는데, 규칙으로 화면을 통제하고 구성하지만, 그 규칙에는 일정 부분 자의성도 포함되어 있다. 화면에서 자의성은 붓 터치 방향, 물감의 농도, 텍스쳐와 같이 그래픽 문법을 회화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번역할 수 없지만, 회화로 존재할 수 있는 범위에서 매체의 조건을 지시하는 모습을 취한다. 따라서 두 작가의 화면은 스스로 대상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돌이표로 구성된 화면이 아니라 1) 소스가 되는 원본 이미지 2) 원본 이미지를 회화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재구축한 부분 3) 회화 자신을 지칭하는 부분이 다중합성된 공간으로 볼 수 있으며, 관객은 평평한 화면에서 돌출된 텍스쳐와 붓질이, 화면을 구성하는 일련의 조형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새롭게 다시 조합해볼 수 있다. 규칙 그 자체로 매체를 지시하기보단, 그래픽 문법에서 회화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맞닥트린 회화라는 변수값이 자의성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화면에서 규칙을 설명하는 일은 전시를 기획 하는 데 있어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자의성은 화면에서 텍스쳐나 두께로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에 굳이 다시 설명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자의성은 엄밀히 말하자면 제한된 조건 안에서의 자의성이다. 따라서 원본 이미지를 회화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두 작가는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출력되는 매체에 따라 원본 이미지에 내포된 조건도 함께 번역한다. 주슬아 작가의 경우, 마법소녀물에서 작가가 선택한 특정한 장면을 캔버스 화면의 소재로 삼는다. 이 장면은 2D 이미지이며, 이동과 정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를 회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모션그래픽의 문법을 가져온다. 가령 1초당 24프레임인 애니메이션에서 움직이는 대상의 한 부분을 설정하여 10초 동안 진행되는 변신 장면을 추출한다면,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의 수 만큼 독립된 좌표값들이 240개의 프레임을 채운다. 240개의 프레임에 누적된 좌표값을 회화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또 다른 조건을 설정하는데, 변신 과정에서 이동하는 대상의 위치를 추출한 좌표값은 5g씩 달라지는 물감의 농도로, 정지된 대상의 위치를 추출한 좌표값은 화면에 쌓은 두께로 나타낸다. 애니메이션이 동영상 창 안에서 재생되는 타임라인으로 이미지의 연속을 보여주었다면, 여기선 화면의 중첩과 물감의 농도, 붓질로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완성된 작품은 회화에 적합한 조건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자의성으로 인해 소스가 되는 원본 이미지와의 유사성과 멀어진다. 물론 소스로 삼은 이미지 자체의 미적 가치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 가령 임석호 작가가 작업의 소스로 사용하는 3D 건축물은 위성사진이나 누군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기반으로 모델링 되며, 이 과정에서 3D 건축물 표면의 이미지는 실제 건물의 모습과는 차이를 갖게 된다. 원본성이 없(어지)거나 이미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저해상도가 된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기에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3D 건축물 이미지가 캔버스 화면으로 옮겨질 때, 3D 건축물을 구성한 조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붓선의 일부가 되어 있는가? 여러 겹의 터치로 쌓여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여기 이 조건은 3D 건축물 이미지가 그랬던 것처럼 오류로 가득한 논리 중 하나로 이미지를 채우고 있는가? 따라서 앞서 말한 자의성은 자기 지시성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현실과의 접점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PRESET»은 소스가 되는 원본 이미지, 회화가 되기 이전 단계의 드로잉, 그리고 회화 이 모든 결과물을 전시한다. 관객은 결과물 사이를 오가면서 현실과 이미지, 혹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 조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눈으로 읽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오토드로우(autodraw)나 딥드림(deep dream)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회화를 하는 것에 대해 마치 제 갈 길 가겠다는 듯 매체의 한계나 조건과 같은 지루한 답변만을 늘어놓거나, 동일한 규칙을 반복하는 기계가 되는 것과는 다른 하나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송하영
영화가 좋아서 영상대학원에 갔다. 지금은 휴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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